[박영남의 수요칼럼] 대선(大選) 때면 생각나는 이야기

 

한국의 선거철 만 되면 내 머리 속엔 한편의 그림이 떠 올라 여기에 소개한다. 유쾌한 장면들은 아니지만 평생을 나와 함께 해온 그런 그림들이다.

박영남 현 달라스 한인상공회 수석고문

우리의 근대사를 한번 살펴보자.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오랜 일제 식민지 기간을 거친 후 1945년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 패하면서 한반도의 남쪽은 유엔 감시하에 1948년 8월 15일 새 나라 대한민국을 수립하고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을 선출하면서 민주주의 국가를 세웠고, 북쪽은 독자적으로 김일성이 수반이 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란 공산국가를 세웠다.

필자는 여기서 허울뿐인 북한의 공화정(共和政)을 논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남쪽의 대한민국호는 대의정치(代議政治)를 표방하는 민주 정부로 태어났다. 전술한 대로 유엔 감시하에 국회가 만들어 지고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국민의 대표 기구인 제헌국회(制憲國會)에서 뽑혔다.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은 1950년에 6.25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한반도는 이번엔 동족에 의해 아수라장이 되었고 부산으로 밀려난 임시정부는 비상 국가 체제로 운영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체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이승만 독재는 철저히 정상배들로 장막을 쌓였고 이승만 정권을 반대하는 세력은 무조건 빨갱이로 내몰려 설 자리를 잃는 철저한 탄압의 대상일 뿐이 였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정치구호가 온 나라를 뒤 덮었다. 사실 전쟁 중인 나라의 무질서가 극에 달한 북새통에서 서구식 민주주의를 논하는 일은 지난했을 것이다. 당시 외신은 한국 민주주의를 보며 “쓰레기통에서 장미꽃 보기” 라 조롱했다. 당시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인 매일 일전일퇴를 거듭하는 전쟁을 이겨 나라를 지키는 일보다 더 급한 것은 없었고 또 하루 하루의 절박한 민생 문제를 해결하는 일보다 더한 급선무는 없었다.

그러나 그런와중에도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결단코 포기할수 없었다. 기왕에 손에 쥔 정권을 놓지 않겠다는 세력과 정권을 잡으려는 세력 간의 싸움은 사생결단이 되었고 그 싸움의 강도는 날로 더해 갔다. 때는 바야흐로 피난 나갔던 시민들이 서울로 속속 모여들 때였다.

1956년5.15 세번째 대통령 선거는 야당 후보였던 해공 신익희(海公申翼熙)가 여당의 이승만을 상대한 힘겨운 선거였지만 불행하게도야당후보인 신익희가 호남지방 유세중 5월5일 기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급서(향년 63세)하면서 이승만은 무혈 재 집권에 성공했다.

당시 야당 후보인 신익희의 시신이 서울역에 당도할 때 필자는 서울시립 도서관 (현 한국은행 뒤편 소공동에 위치)에서 밀린 학업으로 열공하고 있던 중이 였다. 서울역에 들어온 해공의 운구 행열을 보며이는 필시 이승만이 그 배후라는 생각에 (당시엔 집권세력에 의한 테러가 백주 대낮에도 종종 발생했다.) 시신 행열과 함께 당시 대통령관저인 경무대 (景武臺) 경비 초소까지 진출 (당시 해공의 사저가 경무대 인근 진명여고 옆에 위치), 대통령의 직접 해명을 요구하기에이르렀고, 급기야는 종로서 요원에 의해 체포, 수감(收監), 소요죄(騷擾罪)로 재판에 회부되어 (당일에는 1,000여명이 체포되었지만 끝내는 20여명만이 법정에 서게 됨) 재판까지 받게 되면서 약6개원간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獄苦)를 치렀다. 그후 2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되었고 대법에서 확정되었다가 장면(張勉) 정권 때 사면 복권(復權)되면서 유죄 기록도 말소되었다. 이것이 5.5경무대앞 소요사건의 전말이다.

이 일이 있고 4년 후인1960년 3.15네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이기붕 정부통령 후보조는 철저한 경찰력을 동원한, 민심을 철저히역행하는 부정한 관권 선거를 공공연히 자행했다. 당시 선거에서 야당의 구호는 “못 살겠다 갈아 보자” 였고 이는 그대로 부정선거 규탄의 거친 목소리가 되었다. 당시 27일간 행방을 모르던 마산의 고교생 김주열의 시신이 경찰이 쏜 공포탄이 눈에 박힌 상태로 마산 중앙부두에서 인양되었는데 이것이 4.19 민주 혁명으로 이어진다.

2.28대구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와 3.15마산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그리고 무엇보다도 전국으로 확산된 반정부 시위에 결정타를 때린것은 4.18 고대생들이 학교 당국의 제지에도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나선 반정부 시위였다. 이들은 신설동 로타리를 돌아 동대문과 종로통으로 한걸음에 달려, 서울시청 옆, 당시의 국회의사당인 부민관 앞인도와 차도를 연좌 성토시위장으로 만들고 여기서 정부의 조직적이고도 탄압적이 였던 관권 비리선거의 여러 양상을 하나씩 까발리는성토대회를 열었다. 연좌 성토시위는 그 후 귀교 길 세운상가 광교앞을 지날 때 정치 깡패 이정재 일당의 무차별적 몽둥이, 자전거 체인 테러를 만나니 이는 부정한 이승만 정권의 적나라한 자화상이 되였다.

필자는 4.19 당시 대학진학이 늦어 3학년생으로 고대 태권도 부원으로 반정부 시위 행열 선두에서 시위대의 진로를 정리하던 중 동대문경찰서 앞에서 전기한 정치깡패들의 출현으로 피해학생들이 흘린 피로 도로위가 붉게 물 들인 현장의 증인이 되었고 당시에는 인근의 광교다방에 피신했었다. 당시의 급박했던 순간은 동아일보 등 도하 일간지의 사진으로 지금도 그날을 증언하고 있다.

한국 정치사의 한 획을 그은 4.19 민주혁명은 그후 이기붕 일가족의 집단 자살과 이승만의 4월 26일 햐야성명(下野聲明)으로 일단락되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 (The tree of liberty must be refreshed from time to time with blood of patriots and tyrants-by Thomas Jefferson)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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