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남 칼럼] 행복의 조건(幸福條件)—절제력(節制力)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그럼 행복이란 무엇인 가?

박영남 달라스 한인상공회 상임고문

두 주먹 꼭 거머쥐고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 아기는 욕심(慾心)에 사로 잡히기나 한 듯 비명(悲鳴)같은 괴성(怪聲)을 토해낸다. 홀로 앞길을 열어가야 한다는 절박(切迫함이 묻어나는 용트림일 게다. 적수공권(赤手空拳)의 나를 지탱(支撑)할 일은 나 스스로에게 있다는 생존본능(生存本能)의 외침이 나를 꽉 잡아 끈다. 앞으로 경쟁사회(競爭社會)에서 성공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내가 기댈 곳은 나 스스로라는 무의식적(無意識的) 사고가 나를 잡아 흔든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그럼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은 지극히 개인적(個人的)이며 개별적(個別的)인 만족도(滿足度)라 하겠다, 행복은 가시적(可視的),물리적(物理的)이기 보다는 다분히 감성적(感性的)이다. 행복은 무엇을 많이 가졌다고, 큰 것 가졌다고 얻어지고 생겨나고 또 확대(擴大)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보다 섬세(纖細)하고 사소(些少)하며 은밀(隱密)한 곳에 숨어 있다가 잊고 있을 때쯤 나를 찾아와 나를 감동(感動)시키고 자극(刺戟)해서 눈물생을 쥐어짜게 만드는 지극히 감성적인 것이다.

행복(幸福)이란 평온(平溫)한 주변 환경(周邊環境), 남의 간섭(干涉)이 전혀 없는 완전한 자유(自由)로움, 미래(未來)의 모든 필요까지도 충족(充足)시키는 상태에서 만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닐 까 싶다. 혹자(或者)는 행복의 조건(條件)으로 육체적 정신적 건강(健康), 욕구(慾求)를 감당할 만한 재력(財力), 일상을 살아가는 확고한 목적의식(目的意識), 미래(未來)까지 담보(擔保)받는 신앙심(信仰心) 등 네 가지를 꼽지만 그렇지 만도 않은 것이 이 네 가지를 골고루 가졌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것도 아닌 듯싶으니 말이다. 행복에는 끝없는 추가조항(追加條項)이 이어지니 결국에는 행복조건의 충족(充足)은 요원(遙遠)하기만 하다.

미국에서 잘 산다는 마을의 지역민 1인당 연간 평균 소득(年間所得)이 $100,000이 되는 경우가 많다. 금전 만능(金錢萬能)인 자본주의 국가(資本主義國家)에서 부(富)의 편재(偏在)가 용인(容認)되는 곳의 실상(實像)이다. 부러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모든 어려움은 돈으로 해결(解決)된다. 그래서 행복이 보장(保障)되는 가? 아니다. 불행의 지표(指標)인 자살(自殺, 고독사(孤獨死) 등이 도처(到處)에서 생겨나며, 정신적 질환(疾患)이라 할 마약(痲藥), 알코올 중독(中毒)이 사회적 문제(社會的問題)로 남아있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사회를 행복으로 이끌어 줄 가? 그건 인간이 절제선(節制線)을 발견하게 될 때일 것이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먹기)의 진리(眞理)를 알아가는 경지(境地)일 것이다. 분외지재불탐(分外之財不貪, 내 것 아니면 탐하지 말라) 하면 된다. 인류(人類)의 행복은 욕망(慾望)의 실체(實體)인 허무(虛無)를 깨 달아 정지신호등(停止信號燈)의 불을 켜고 그 자리에 멈춰 설 수 있은 때 찾아온다. 성경의 전도서(傳道書, Ecclesiastes)는 이 허무라는 말로 도배(塗褙)된 책이다. 지향점(指向點)을 잃고, 달리기만 하는 욕망이 멈춰 설 곳을 놓치면 행복도 함께 사라지고 만다.

멈출 자리를 잃은 끝없는 탐욕(貪慾)의 끝은 파멸(破滅)이며 불행(不幸)이다. 독일의 대 문호(文豪)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희대(稀代)의 작품 파우스트(Faust)로 나름 행복을 설파(說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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