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한국이민사박물관 홈페이지
오는 13일(토)은 1902년 12월 22일 최초의 한인 이민자들이 미국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는 미주한인의 날이다. 미주 한인들이 미국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막대한 공헌을 한 것을 기리는 미주한인의 날을 맞아 북텍사스 코펠시 의회에서도 ‘미주한인의 날’을 선포하기로 결의했다.
오는 9일(화) 코펠시 의회는 미주한인의 날을 선언함으로써 북텍사스 지역사회에서 한인사회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한미 양국은 1882년 평화로운 관계와 우호, 상업거래 등을 확립하는 조약을 체결한다. 이후 한국의 외교관과 학생, 정치인, 사업가들이 미국을 방문하게 됐다. 이후 1902년 12월 22일 102명의 한국 이민자들이 SS 겔릭호(SS Gaelic )를 타고 하와이 호놀룰루로 항해를 떠났다.
신체검사에 합격한 102명은 인천을 출발한지 약 20일만에 하와이에 도착한다. 이중 16명은 질병으로 다시 고국으로 되돌아가야 했고 86명만이 최종 상륙 허가를 받았다. 이후 3년 동안 하와이로 이주한 한인은 7, 400여명에 달한다. 이들 이민 1세대의 후손들은 하와이에 그대로 남거나 본토로 건너 오늘날 한인 사회의 뿌리를 형성한다.
두번째 이민 붐은 일제강점기다. 일본 제국주의의 횡포와 억압에 도망치듯 고향을 떠날 결심을 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토지를 빼앗긴 농민과 노동자들은 만주와 일본으로 자력으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 이주와 강제노동을 당한 한인들도 상당하다.
독립운동가들은 일제강점기하의 조선에서 활동하는데 어려움을 겪자 미국과 중국, 러시아 등으로 이주했고 현지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대표적 예가 미국 캘리포니아에 자리잡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한국전쟁 이후의 아픔을 간직한 이미도 많다. 입양된 전쟁고아들이 대표적이다. 1955년부터 현재까지 해외로 입양된 아동은 20만명이 넘는다. 미군과 결혼한 여성들에 의한 이민도 한국전쟁 이후 급증한다.
한국 근현대사와 미주한인이민사는 연결되어 있다. 한국전쟁 이후 1962년에는 해외이민법이 제정된다. 이후 남미 지역과 독일 광부 및 간호사 이민이 증가했고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된 이후에는 미국과 캐나다 이민이 증가했다.
한인이민사에서 가장 많은 한인의 미국이민은 1985년에서 1987년으로 집중 되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후 잠시 주춤하던 이민물결은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다시 증가했고 오늘날에도 학업이나 취업, 자녀교육을 위한 이유 등 미국으로 이민을 결정하는 한국인들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초기 이민자 중 한명인 도산 안창호 선생은 미국에서 윌로우즈 한국 항공단을 창설한 공로를 인정바았고 새미 리(Sammy Lee)는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며 레이건과 부시 행정부에서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웨디 그램(Wendy Gramm), 1974년 미국 연방 법원 9지구 항소법원 판사로 임명된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인 Herbert Y.C. Choy 판사, 로스앤젤레스의 리틀 도쿄 활성화를 담당했던 건축가인 데이비드 현, 프린스턴 신학교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인 종신교수 이상현 박사 등 한인 이민 초중반 한인들은 미국사회에서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한인인구는 급증했고 정치와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한인사회 위상 향상을 이끌었다.
2003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최초의 한인 이민자 도착 100주년을 기념한다고 선포한 뒤 2005년 미국 상원과 하원은 미주 한인의 날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전국적으로 1월 13일을 미주한인의 날로 기념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안미향 기자 amiangs021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