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남 칼럼] ‘정쟁’과 ‘사화, 필요 ‘악’인가?

"사익(私益)과 국익의 추구(追求), 선공후사(先公後私)가 무엇인지 살펴야"

 

 

왕(王)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에는 권력(權力)이 왕에게 집중(集中)되고 있어 국정(國政)은 왕이 뜻대로 처리할 수 있었다. 왕이 영특(英特)하고 신하(臣下)들이 국정운영(運營)을 실수(失手)없이 처리해 주면 되었다. 경험 많은 유능한 신하를 주변(周邊)에 두는 일이 매우 중요한 왕의 능력이었다.

재상(宰相)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으로 최고(最高)의 권력실세(實勢)였다. 그래서 자연 왕을 돕던 신하들 간의 자리다툼은 치열(熾熱)했다. 역사기록(歷史(紀錄)을 보면 여러 사화(士禍)에는 파벌(派閥)과 붕당(朋黨)과 측근(側近)들의 자리 다툼이 있을 때마다 나라는 어려웠다. 상대(相對)를 요직(要職)에서 몰아내는 음모(陰謀)가 도를 넘는다 싶었다.

박영남 달라스 한인상공회 고문

오늘날은 어떠한 가. 별반 다르다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언제나 막후(幕後) 권력자에 따라 정치적 향배(向背)와 개인의 정치적 운명이 좌우(左右)된다. 언필칭(言必稱) 정권은 국민을 위해 일하는 권력이다. 왕권시대나 민주주의를 구가(謳歌)하는 오늘에나 권력자의 한가지 목표(目標)와 명분(名分)은 항상 국민(國民)이다. 같은 정치노선(路線)을 가진 무리의 모임이 정당(政黨)이다.

과거에는 국민을 위한다는 말은 곧 임금을 위한다는 말과 혼용(混用)되어 왔다. 임금을 위한 길이 곧 국민을 위하는 길이였다. 위정자(爲政者)들의 쟁의(爭議)는 곧 누가 백성을 더 잘 살게 할 것인가 하는 경쟁(競爭) 터였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 또는 왕이 바뀌는 과정(過程)은 항상 껄끄러웠고 정쟁(政爭)의 와중(渦中)에 휩싸였다.

정쟁은 국내 정치집단의 이전투우(泥田鬪牛)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 외세(外勢)까지 불러드려 국내정치의 향배를 심각하게 훼손(毁損)했다. 정치는 과연 살아있는 생물(生物)이라 하겠다. 국리민복(國利民福)이란 허울을 쓴 낮 도까비, 명분을 앞세워 정적제거(政敵除去)에 사활(死活)을 거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같아 보인다. 고자질과 헐뜯기, 밴댕이들의 속 좁은 내시(內侍)정치의
모습은 지금도 여전해 보인다.

무(武)보다 문(文)을 숭상(崇尙)하는 이조사회(社會)는 유학(儒學)과 유림(儒林)이 중심이 였고 학벌(學閥) 내지 지방색(地方色)을 중히 여기니 결과적으로 4대 사화와 예송논쟁(禮訟論爭)이라는 소모적(消耗的), 국론분열(國論分裂)에 매몰(埋沒)되는 퇴행적(退行的) 사회로 전략(顚落)했고, 심지어는 임진란(任辰亂)의 구국영웅(救國英雄)까지 모함(謀陷)하게 된다.

이들 사화는 연산군(燕山君1498~1545)부터 중종(中宗), 인종(仁宗), 명종(明宗) 임금 재위(在位) 시기인 불과 50여년 어간의 일들로, 발단(發端)은 사초(史草)에 실린 비위(非違)와 사감(私感)이 왕가(王家)의 심기(心氣)를 건드린 것이 도화선(導火線)이 였다.

예송논쟁은 왕실 후궁(後宮)들의 장례복식(葬禮服飾)을 둘러싼 두번의 시비곡직(是非曲直)으로 1659, 1674년에 각각 발생한 사림간(士林間)의 논쟁으로 명분과 체통(體統)의 한판 승부(勝負)가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잊지 말아야할 것은 임진왜란(1592~1598) 당시의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白衣從軍, 직위없는 종군)을 통해 당시(當時)의 부조리(不條理)를 읽으며, 사익(私益)과 국익의 추구(追求), 선공후사(先公後私)가 무엇인지 살펴야 할 것이다.

내로남불 (내가하면 美談, 남이 하면 不倫)이 횡행(橫行)하고 소위 사회 지도급들의 희생(犧牲)이 따르지 않는(군역도 면한) 뻔뻔함, 노불레스 오불리주(Noblesse Oblige)가 부재(不在)한 지도력이 얼마나 한심한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정권놀이에 급급(急急)한 오늘의 한국정가는 실로 과거 이조시대의 사화들과 예송논쟁의 해약(害惡)을 한번 쯤 곱 씹어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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