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엘리스 From the Wonderland
그 날도 그저 평범한 하루였다.
반나절은 가게에서 일을 하고 필요한 가게 물건 쇼핑을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막내는 일하러 갔고, 남편은 미팅이 있어서 늦게 올 거라고 알고 있었다. 현미밥에 상추, 계란, 두어가지 반찬을 꺼내어 혼자만의 평화로운 식사를 하고, 보리차 한잔 만들어 마시면서 느긋한 저녁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게에 필요한 재료 준비며 소소하게 할 일이 있었지만 다음날 하기로 하고, 남아있는 실로 조끼를 만들어 입으려고 시작한 뜨개질이 가장자리만 뜨면 되는 마무리 단계에 있는 걸 생각해 내고 뜨개질을 하기 시작했다.
마침 친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남편이 3월에 있을 행사때 필요한 클래식 연주 팀 섭외를 부탁했었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며 혹시 집에 있는지 물어왔다. 음악을 전공한 이 친구가 지난번 행사에도 연주 팀을 찾아 주었는데, 이번 행사를 위해서 남편이 또 부탁을 했던 모양이었다.
시간을 보니 밤 9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친구와 통화를 끝내고 남편에게 전화를 해 보니, 들은대로 신호가 가질 않고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필요하면 메세지를 남기라’는 음성 녹음으로 바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사람들과 만나는 중이라 전화기를 꺼 두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뜨개질은 어느새 조끼 밑단을 다 마무리하고, 한쪽 소매도 끝내고 남은 다른 쪽 소매단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12시가 다 되어 있었다. 남편에게 다시 전화를 하고 또 해 보았지만, 여전히 신호는 가지 않고 음성녹음이 나왔다.
몇번을 걸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연락없이 늦게 들어오는 적이 거의 없는데, 갑자기 걱정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오늘 만난다고 했었던, 나와도 친분이 있는 한 분에게 실례를 무릅쓰고 자정이 넘은 시간이지만 카톡을 보냈다.
금새 답이 왔는데 만나긴 했지만 9시쯤에 헤어졌다 했고, 그 답을 들은 후에는 더 불안해졌다. 무슨 일이 생겼나 사고를 당했나, 불길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여러가지 가능성의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또 누구에게 연락을 해 봐야 되는지 고민하며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드디어 차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보니 밤 1시반이 지나 있었다. 퀭한 얼굴에 초긴장된 모습으로 맞이하는 내 모습에서 마음을 읽었는지 전화기배터리가 죽어있었던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며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여러번을…(남편에게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 듣기는, 일년에 아니 몇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매우매우 드문 일이다!)
미팅을 끝내고 먼저 갈 사람들이 떠난 후 2차로 몇 분과 함께 이야기하다가 다음 날 해도 되지만 잊어버리면 절대 안 될 중요한 처리할 일이 생각나서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일을 끝내고, 피곤해서 잠깐 눈을 붙인 것 같았는데 깨어나니 1시가 넘어 있었다라는 이야기였다.
무사히 살아 돌아왔으니 일단 너무 감사했고 미안하다며 진심을 담아 말하는게 느껴져서 앞으로는 전화기 잘 확인하고 꼭 연락을 해 주시오하며 짧은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하나님께 참으로 죄송하게도 늘 지켜 주시리라 믿고 의지한다 하면서도 연락이 닿지 않던 몇시간의 초조함이란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순간에 들었던 여러가지 후회들, 남편에게 했던 상냥하지 못했던 말과 태도들, 바쁘다는 핑계로 음식도 잘 못해주고 건강에 좋은 것도 잘 안 챙겨 준 것들이, 마음 한켠에 계속 남아있었다.
남편에게 무엇을 챙겨 주어야하나 생각하다, 어제 코스코에 들러 여러가지 약들을 한아름 사서 돌아왔다. 50 플러스 남성용 종합 영양제, 관절 아플때 먹는 약, 뼈 건강을 도와주는 비타민 D3 등 때마침 세일하는 약들도 많기에 카트 가득 담았다. 오늘 아침, 약병들을 보고 살짝 놀란 듯 보였다.
남편! 이번달 카드값 좀 많이 나와도 놀라지 말아요…이제 겨우 시작이니까. 그리고 내 약은 하나밖에 안 샀어…